역대 회장님 말씀
국제포교사회에서 역임하신 회장님들의 경험과 생각들을 전합니다.
1. 어려웠던 일/기억에 남는 일/아쉬운 일/보람된 기억
(어려웠던 일)
국제포교사 창립에 참여한 이후 초대 사무총장과 부회장 홍보부장 등을 맡으며 나름 조직발전에 기여해 왔지만, 감회가 교차합니다.
무엇보다 어려웠던 일은 제4대 회장에 취임과 관련한 사항입니다. 제3대 회장 소임이 마무리 되는 시점에 차기 회장을 선출해야 하는데, 공고기간이 두차례 지나고도 아무도 지원하지 않아 불가피하게 주위의 권고로 제가 단독입후보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국제포교사회의 명맥을 유지하고 차기 회장에게 바통을 넘겨주는 소임이라 맡게 되었습니다.
회장 재임시에 어려웠 던 일은 사무실이 몇 차례 바뀌고 간사가 여러 차례 바뀌는 등 조직 안정을 기하기 어려웠던 점입니다. 당시 김윤희 간사가 출산 휴가를 가면서 벌어진 상황에서 여러 포교사님들이 릴레이로 어려운 간사 소임을 맡아 고생해 주셨습니다.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심해경 포교사님은 추운 겨울 손이 시려워 피부에 손상이 올 정도였는데 미쳐 챙겨드리지 못해 죄송스럽습니다. 부족한 회장과 함께 보조를 맞추느라 고생하신 분들 모두 건강하시고 행복하기길 기원드립니다.
당시 총무원장 법장스님께서 입적하시는 등 일정기간 분위기가 어수선했던 점도 아쉽니다.
(기억에 남는 일)
그래도 기억에 남는 일은 국제포교사회 창립에 2기 출신들이 1996년 배출되고 1년을 더 기다려 1998년 마침내 단체를 창립하게 된 점입니다. 초대 사무총장으로서 부족한 점이 많지만 정관 초안을 기초하고 포교사님들의 재가를 얻어 포교원 산하 단체로 자임을 했습니다. 종단의 정치적인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조계종 종지종풍을 선양하는 의미에서 명실상부한 ‘포교단체’가 되기 위해 포교원 산하단체로 한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됩니다. 당시만 해도 종단의 불안정한 상황이 조금 걱정되던 시대였거든요.
또한 국제포교사 회장 임기를 2년 단임으로 못박은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단체에 따라서는 회장 임기를 오래 끌면서 이권에 개입하는 등 부정적인 요소가 많아서 아예 우리는 단임만 하는 것으로 했는데, 그것도 오늘날에 와서는 좀 장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창립 당시의 취지가 있었다는 것을 밝히고 싶군요.
초대 양장운 회장을 모시고 종단 영문소식지 ‘Lotus Lantern'을 발간하기 시작한 점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이기석 포교사가 적극 참여했고, 저는 기자출신으로 뉴스부분 원고작성과 영역을 전담했습니다. 전체 감수는 유명한 브라이언 배리 선생님께서 해주셨고요.
또한 우리 국포사회의 로고를 만든 것도 당시 일입니다. 저를 비롯해 여러 포교사들이 의견을 냈고, 그것을 종합해서 브라이언 선생님이 멋지게 디자인해 주셨습니다. IDIA의 영문글자를 잘 반영하면서 도안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쉬운 일)
아쉬운 일은 회장 재임시 좀 더 조직을 튼튼히 하고 단합된 힘을 일궈내지 못했던 한계를 느낍니다.
특히 WFBY 활동과 관련해 종단을 대표하는 청년단체로서 국제포교사회가 WFBY KRC(Korea Regionl Center) 자격으로 활동을 했는데, 특정 스님(국제포교사 출신)의 자의적인 힘으로 국제포교사회와 무관한 조직으로 되어버린 점이 무엇보다 아쉽니다. 그 스님은 그 후 국제포교사회가 별도로 WFBY 가입단체로 등록하는 것조차 막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단히 잘못된 것이고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보람된 기억)
그래도 기억에 남는 일은 회장 재임 시절 기초불교영어 강좌를 시작해 지금까지 꾸준히 이어져 오고 있는 일과 영문 자타카 암송대회를 추진키로 하고 임기 직후인 이듬해 여법하게 시작한 것이 오늘날까지 훌륭하게 이어어고 있는 일입니다.
외국에 계신 무진스님을 모시고 회원들을 위한 단기 교육을 했었던 일, 현각스님을 모시고 조계사 대웅전에서 영어법문을 개설했던 일도 기억에 남습니다.
저는 참석을 많이 못했지만 백하현 포교사님이 등산모임을 만들어 회원들과 유대를 나눴던 일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후원의 밤 행사를 당시 국제포교사회 당연직 총재이시던 포교원장 도영스님을 모시고 한국일보 송현클럽에서 한 일이 기억에 남습니다. 도영스님 비롯해 선묵혜자스님(당시 도선사 주지) 등 외부 관계자와 우리 국제포교사 회원들의 적극 동참으로 오늘날 사무실 마련의 종자돈을 조금이나마 보탤 수 있었다는 점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국제포교사 양성과정이 처음에 연등국제불교회관 원명스님의 지도로 이뤄지다가 한때 종단 포교원에서 맡다가 결국 국제포교사회로 이관되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아마도 회장 임기 첫해인 제10기 양성과정부터 본격화된 것으로 기억합니다. 프로그램 과정을 직접 짜고 강사진을 섭외하고 등등. 앞으로 더욱 발전되길 기원합니다.
또한 기초불교영어 코스는 국제포교사회 자체 코스였던 것이 지금은 종단에서 인증받은 코스가 됐다고 알고 있습니다. 자랑스럽습니다. 강사진도 더 풍부하게 만들고 코스도 다양하게 개발해 더 많은 인원들에게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게끔 제공했으면 좋겠습니다.
2. 회장 또는 소임을 맡아 본 후에 국제포교사회에 대한 생각의 변화
제4대 회장 선출 당시 두 번이나 출마하는 후보가 안계시는 바람에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회장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한분의 기권을 제외하고 참석자 전원의 지지로 임기를 시작했는데 의외로 조직을 원활히 이끌어 나가기에 역부족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우리 국포사 회원들이 더욱 더 자발성을 갖고 참여할 수 있도록 하지 못한 점이 생각납니다. 그런 점에서 국제포교사회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이냐에 대한 숙제를 남기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후원의 밤 행사는 집행부 임원 전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게 회장으로서 밀어붙인 것입니다. 회장으로 취임할 때, 이것 하나만큼은 조직을 위해서 하겠다, 즉 재정에 도움이 되도록 하고 싶다는 원력이 있었기에 그렇게 한 것인데요, 평가는 여러분께 맡깁니다. 하지만 조직의 기반은 재정이기도 하니까, 포교사로서의 소중한 전법도생 원력과 더불어 21세기에 잘 살아남을 수 있는 방안을 함께 지혜를 모아 추진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습니다.
한편, 역대 회장님을 비롯한 임원들이 많은데, 그 분들이 조직 내에서 보다 융화될 수 있고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조건들을 만들어 나가는 일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너무 역량을 소진해서 쉬고 싶은 것이 사실입니다만, 또한 인연에 따라 적절한 역할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함께 지혜를 모았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오고 가는 인연들을 소중히 여기는 단체가 되길 바랍니다.
3. 수행인으로서 한 말씀
우리 조직이 외부에서 듣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는 포교사단에 비해 신심이 부족하다는 이야기입니다. 2년간의 불교대학 이수를 하고 품수받는 포교사들에 비해 3-4개월 연수로 품수받는 국제포교사 간에 차이는 분명 있을 것입니다.
포교사의 생명은 수행과 전법입니다. 우리 국제포교사들도 매월, 매주, 매일 현장에서 혹은 법당 공간에서 수행과 전법에 매진해야 합니다. 각자 생업이 계신 분들은 그 사정에 맞게, 또한 생업에서 벗어나신 분들은 더욱 더 좋은 기회를 가지기를 바랍니다.
저는 대학생 시절부터 염불 수행과 담선 법회 참여, 단기출가 참여 등 경험이 있습니다. 가장 핵심은 아상을 내려놓은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꾸준히 절차탁마가 필요합니다. 특히 도반들과 함께 하는 수행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4. 발전을 위한 제언 등
국제포교사회를 창립하던 당시 조그마한 원력들이 쌓여 오늘날과 같은 발전을 이뤘습니다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할 수 있겠지요.
현재 박홍우 회장님께서 원력이 크시고 회원들도 좋은 분들이 예전보다 많이 보강되었기에 서로 존중하고 활기차게 활동해 나간다면 비전이 많다고 사료됩니다. 어느 단체나 자칫 혼자의 주장을 강하게 하시는 분들이 문제를 일으키기도 합니다만, 국포사회는 그렇지 않고 화합할 수 있도록 서로서로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단법인 문화나눔은 제2의 도약을 위한 발판입니다. 여러모로 어려운 점이 많으신데 도움을 못드려 죄송스럽습니다. 잘 운영되길 뒤에서 나마 미력을 보태고자 합니다.
포교사님들 모두 수고들 많으세요. 성불하세요()
김봉래 합장
(국제포교사 2기, 제4대 회장)